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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08:58 사회 / 역사 / 인문
탐욕의 시대 - 10점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갈라파고스

<학교 과제 제출을 위해 쓴 서평입니다. >


  장 지글러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였다.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가 목도한 것은 고통과 절망, 무기력함,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들이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애써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뭇 분노에 차 있다. 흡사 모노연극의 주인공처럼 생생하게 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1막 - 부조리와 무기력에 대한 분노  

“시민들의 4분의 3이 눈물 없이는 식량을 조달할 수 없을 때 공화국은 한낱 유령에 불과하다”-자크 루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70억 지구인 중에, 소득이 하루 1달러 미만인 굶주리는 빈곤층이 20억 명이다. 5초마다 영양결핍이나 그로 인한 질병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죽어간다. 지구의 북반구에서는 영양과다(비만)으로 10억 명의 사람이 고통에 빠져 있는 반면에, 남반구에서는 매년 수백만 명이 영양결핍으로 죽어간다. 경제학자 존 맥밀런은 산업혁명과 녹색혁명의 결과 역사 속에서 인간의 식량생산은 증가했음을 말했다. 비록 경제성장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필수적으로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글러가 밝히는 바에 의하면, 실제로 현재 지구의 생산력으로 1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전지구적으로 식량이 남아 버려지는데, 한편으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고 있다. 어딘가에 외계인이 50억 명이라도 살지 않는 이상, 이 문제의 원인은 분명해 보인다. 많이 가지고 있는 자로부터 부족한 자에게 식량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이 보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숱한 말들은 그저 언어의 낭비가 될 뿐이다. 생존을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다. 명예는 생긴 적도 없고, 자존심 마저 잃어버리고 수치심과 비굴함에 허우적이는 상황에서 인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스스로만 챙김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다른 인간이 인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자각이 없음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브라질 북부 판자촌에 사는 주부들은 저녁이면 냄비에 돌을 넣고 물을 끓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어머니들은 배가 고파서 보채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밥이 될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그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어미가 느끼는 수치심을 감히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본문 중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1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에 당황하고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현실의 부조리함과 스스로의 무기력함으로 인한 수치심은, 이내 곧 분노로 전환된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이 수치심을 버리게 만들고, 인간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수치심조차 알지 못하며 분노를 자아내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규명하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제 2막 - 살인 수법에 대한 분노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다. 항상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도 인간이다.”

-푸시킨    

   지글러가 밝히는 암울한 현실의 원인은 탐욕에 있다. 수치심의 권력(the power of shame)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도덕성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돈에 대한,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도덕성을 마비시킨다. 스스로의 영욕만을 채우고, 타인은 말 그대로 ‘타인’으로만 여기며 인간의 보편적인 수치심에 대해서는 무시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남아도는 재화(식량)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굶주리게 만드는 것의 중심에는 탐욕이 존재하고, 이 과정의 구체적인 작동기제가 외채(부채)라고 말한다. 즉, 탐욕이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고 살해하는 근원이며, 구체적인 살인 도구는 세계화주의자들이 휘두르는 외채이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가 르완다 사태이다. 르완다는 후투족과 투치족이 인구를 구성하고 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 리마나 대통령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르완다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길 바랐던, 프랑스는 르완다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후투족은 과거 벨기에의 식민지 시대 때 소수인 투치족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리마나 대통령은 이 자금을 이용해서 중국으로부터 칼을 수입하고, 각종 무기를 구매했다. 그리고, 유명한 르완다의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1990년부터 4년간 100만 명의 투치족이 살해당했다. 이후 인근 국가로 도망간 르완다의 청년들이 무장세력을 조직하고 르완다 내전이 시작된다. 투치족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고 르완다에 남은 것은, 전쟁의 흔적 외에 투치족을 살해하기 위해 사용된 10억 달러의 외채이다. 파괴될 대로 파괴된 르완다의 새 정부는 자신들을 살해하기 위해 차용된 이 10억 불에 대한 상환을 거절한다. 도저히 그들은 10억 달러의 사용처도 괘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도저히 갚을 능력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주의자들이 내린 평결은 세계로부터의 지원 중단과 철저한 고립이었다.

 

   자본이 부족(없다시피)한 가난한 국가는 자본을 차입할 수 밖에 없다. 차입된 자본을 투자해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원리금과 이자를 갚으면 된다는 기본적인 논리는 일면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 세계화주의자들의 탐욕이 끼어든다. 부패한 후진국의 정부(관리)는 대출받은 자금을 일단 스위스나 몰타 같은 조세회피 지역의 개인계좌에 입금시킨다. 대출을 해주는 쪽은 이를 알면서도 대출을 해준다. 높은 이자를 보장하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냐는 것이다. 오히려, 세계화주의자들이 선물을 제공하고 뇌물을 공여해 부패를 일으킨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쉽사리 구별할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금고에 남은 금액은 없고 경제를 성장시킬 자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채무 관계 뿐이다. 결국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국민들을 쥐어짜 더 가난하게 만들 뿐이다. 한 번 시작된 채무관계에서 가난한 나라가 상환을 통해 스스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설령 국제기구의 자금을 지원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금에는 사용처가 정해져 있고, 세계주의자들이 원하는 곳에만 써야 한다. 굶주리는 자국민들을 위한 곳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허기짐은 계속된다.

 

   이것은 국가적 채무 관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원료와 값싼 노동력을 찾아 제3세계로 향한다. 가난한 국가들은 다국적 기업의 자국 내 직접 투자를 통한 경제성장을 기대한다. 일자리가 없는 자국민들의 생활이 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자국 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다국적 기업은 제3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지역 국가에 재투자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화폐(달러나 유로)로 바꾸어 북반구에 있는 자국으로 송금한다. 게다가 다국적 기업의 노동착취(탄압)는 봉건시대의 제후와 다를 바 없다. 나이키의 아동노동이나, 커피생산공장의 원산지 가격 폭락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다국적 대기업들의 이윤창출 행동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가난한 자가 스스로 수치심을 버리게 만들고, 부유한 자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버리고 부를 추구하게 만드는 것은 도덕성 상실 때문이다. 상실의 원인은 탐욕이다. 이윤추구행위 자체는 결코 비난 받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주의자가 지배하는 작금의 시대에서 이윤추구행위는 칭송받고 존경을 받는다. 탐욕이라는 것도 이를 나쁘게 표현한 것일 뿐, 이윤추구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둘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탐욕으로 인해 도덕성이 상실되었다면, 도덕적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탐욕적인지 아닌지 살펴보면 될 일이다. 도덕이라는 것 자체의 의미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런데, ‘도덕’은 이 단어 저 단어에 갖다 붙이곤 한다. 예를 들어, 장사꾼은 상도덕을 꼽을 수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모두가 도덕을 지켜야 할 것처럼 강요를 하는 것이다. 도덕은 자발적으로 지킬 때 좋은 것이지, 좋은 것이니깐 일단 준수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일 뿐이다. 탐욕적인 다국적 기업은 도덕성을 상실하였지만, 도덕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상도덕을 지키라며, 채무-채권 관계를 제대로 이행하라고 강요한다. 법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은 지키지 않는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도덕적인 책임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국적 기업이 가난한 국가에서 그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도덕을 무시한다.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네슬레의 농업 담당 국장 한스 조허는 가난한 커피농장 농부들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해결 방법이란 ‘2500만 명의 노동자 중 1000만 명을 없애는 것’이다.

 

   노동자의 인권, 지역 주민의 건강이나 지역 환경 등은 다국적 기업이 흔히 선언하는 사회적기업의 모습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오직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것과 연결이 될 때, 도덕은 잠에서 깨어나고 활동한다. 다국적기업이라는 ‘법인체’에서 일말의 인간과 같은 도덕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까.

 

    제 3막 - 살인자에 대한 분노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장 지글러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

 

   지글러는 ‘외채’라는 구체적인 도구를 통해 실현되는, 세계화주의자들의 탐욕에 대해 분노한다. 노동자들, 가난한 소비자와 국민들, 후진국의 정부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뭉쳐있는 세계화주의자들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절실히 알고 있다. 그는 대안으로서, 외채 상환을 거부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채무자들은 힘이 없고 쉽사리 굴복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지글러는 연대를 통한 혁명을 얘기한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지글러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움직일 수 없는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현실에 맞서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이론들을 혁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글러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저항의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이다.

   첫째, 사회 집단들은 연대의식에 기반 하여, 특히 북반구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시민단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채무국들이 혼자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을 하면, 앞서 본 것처럼 국제사회로부터 제재를 받거나 고립될 수 있으므로, 채무국들이 연대를 통해 단체로 디폴트 선언을 하는 것이다. 셋째, 과거 외채에 대해 철저히 감사를 벌여 부패와 같은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채무관계에 한해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는 것이다. 지글러 스스로 말했듯 결과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러나,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아와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은 한시바삐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글러가 말한 것 처럼 ‘혁명’ 외에는 대안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우울하다. 혁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결론이 나든,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 이는 자발적으로 혁명에 뛰어든 사람 외에 (말 그대로) ‘말려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국가주의나 패거리문화, 집단의식에 대한 이야기나, 개인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소속이나 연고를 가지고 평가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나고 신경이 예민해진다. 앞에서 언급한 도덕의 문제도 이 시대의 도덕의 상실을 말하면서, 개인에게 도덕적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혁명을 마지막 대안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제 4막 - 나의 분노, 위선에 대하여  

“여름 내내 부지런히 일한 개미는 한겨울 추위가 찾아왔을 때 배부르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열심히 일하지 않고 바이올린 켜고 놀던 베짱이는 겨울 추위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다.” -이솝 우화

 

   지금까지 책에서 본 것은 비참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굶어죽어 가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다. 지글러가 보여준 것에 십분 공감하며, 자본주의의 기득권자들의 탐욕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지 볼 수 있었다. 세계화주의자들의 행동을 막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괘씸한 것은 그들의 위선적인 수사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를 부지런하지 못하거나 능력 부족으로 꼽는다. 자본주의라는 구조와 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감춘다. 선진국에서 조차 다국적기업이 공장 이전 협박을 통해 임금을 낮추고 근로조건을 열악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경쟁의 압박, 시장 상황의 급변, 위축, 원가 상승 등 많은 이유들을 내세우지만, 가장 악독한 다국적 기업들이 가장 큰 매출 성장을 보이고 있다. 노동 강도는 다시 높아지고, 악화되는 근로환경에도 노동자는 불안에 떨고 손해를 보아야 한다.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 여러 주장이 가능하지만, 최우선적인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 아닐까. 어느새 인간답게 사는 것을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 기득권자들의 논리는, 현실의 구조를 무시하고 위선을 떠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 이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다. 반면에, 노동은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동은 언제까지 자본에 비해 약자로 남아있게 될까. 생산의 가장 대체 가능성이 높은 부속품 취급을 당하는 것이 지금의 노동이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백수 아니면 노동자인 상황이다. ‘근면성실’ 이라는 미명 아래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착취하면서, 가난한 원인을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 돌리는 자본주의의 태도가 지금의 부조리한 기아와 굶주림을 가져왔다고 믿는다. 결국 지글러가 말한 혁명의 목표라는 것도 이와 유사한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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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hnjinho